#7 수능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

A. 최근 디지털 노마드 업계의 핫한 주제 중 하나는 SEO(검색엔진 최적화)이다. 이는 양질의 정보를 담은 깊이 있는 컨텐츠가 아닌, 네이버 검색봇의 웹사이트 크롤링 형태에 최적화된 온라인 컨텐츠만 살아남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네이버는 이미 존재하는 웹사이트를 무심하게 갈무리해서 검색결과를 나타내었을 뿐인데, 시중의 SEO 업체들이 검색 알고리즘의 형태를 분석해 네이버의 입맛에 최적화된 콘텐츠를 대신 설계해준다는 것. 그러니까 네이버의 검색시장 점유율이 독점단계에 이르면서 온 세상의 웹 컨텐츠가 네이버봇의 입맛에 종속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이 세태를 보며 우직하게 학과공부만 하는 대신, 역대 수능 출제경향에 맞추어 족집게 고득점 비법만 연마하는 대치동 학원가의 숙달된 수험생을 떠올린다.

B. 원래는 교과서에서 배운 기본개념을 바탕으로 담백하게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시험이다. 그러나 2009 교육과정 개편 이래로, 평가원이 이미 나왔던 소재를 이미 안다고 가정하고 출제를 하다보니 문제가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한 것이 2012학년도부터이다.

2012 수능 문제와 2019 6월 문제의 비교. 소재는 비슷하게 출제되었지만 문제 자체의 난이도는 완전히 다르다.

# 이를테면 2014 수능에서는 ABCDE에 대해 물어보고 난 후, 2019 수능에서는 '너 ABCDE는 당연히 알지? 그럼 ABCDEFGHIJK에 대해서 풀어봐 ^^' 이런 느낌. 그런 식으로 소재도 계속 누적되고 수능문제가 복잡해짐에 따라서 보통의 학생들이 100분 안에 기본개념만으로 문제를 풀기는 거의 불가능한데, 특히 2017~2018년에는 정답률 0.x%대의 수능킬러문제의 난이도가 정점을 이뤘었다.

# 그런 수능의 변화에 맞춰 강사들이 기출을 분석하고, 기출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들에 대한 파훼법을 뽑아내서 그 결과를 학생들에게 알려주기 시작한 것이 2016~2017년이다. 그렇게 말 그대로 수능수학에 나오는 테마를 유형별로 정리하는 것을 “테마정리”, 다른 말로는 "도구 정리"라고도 부르는데, 이게 몇 년전부터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는 학습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점을 찍은 것이 2020년도 수능.

C. 2020년 수능을 대비하며 가장 중요한 "테마"를 꼽는다면 '항등식의 양변적분', '음함수의 기울기', '합성함수의 그래프' 세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는데, 25년간 수능이 치러지면서 '항등식의 양변적분'과 '합성함수의 그래프' 테마는 2019년에, '음함수의 기울기'는 2020년에 처음으로 등장한 주제이다. 20년 넘게 수능이 치러지는 동안 한 번도 출제되지 않다가 2019~2020년에 처음으로 출제되었다고.

# 그러다보니 시중 사교육 강사들은 자체적으로 테마를 분석해 파훼법을 개발해 학생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합성함수의 그래프' 소재를 예로 들자면,

소재 자체가 2019.9평 30번에서 처음 등장한 다음 2019 수능 30번에 또 출제가 되니 그 다음 해 모든 사설문제의 30번이 합성함수 그래프 문제였다. 이 테마를 풀어내기 위해 등장한, 그 유명한 'N축' 풀이가 처음 대치동에서 풀리고 유튜브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간 것 역시 2019년이다. 그런데 막상 2020년 수능에는 등장하지 않아 열기가 식어버렸고.

D. 수능이 본질에서 벗어나 '이 테마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식의 이지선다형 찍기싸움으로 변해버리니 학생들의 공부방식도 괴랄하게 변할 수 밖에. 한 고3 현역 학생의 예시를 끌고 들어오자면,

"2019년 드디어 고3이 된 고삼이.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개념을 먼저 익혀야겠지? 그래서 뉴런이나 드리블 같은 실전개념강의를 골라서 듣고, 기출을 병행하며 N제를 풀기 시작!

N제 푸는 동안 현강 들으면서 인강 강사들이 합성함수나 지수로그 풀이 같은거 신기하게 함. 정석적이라기보단 스킬이나 실전개념에 입각해서 문제를 풂. 이걸 본 고삼이는 어땠냐하면,

"오오오오오오오오오!!!!!!"하고 스킬 뽕에 차올라서 스킬들을 하나하나 익히기 시작.

9평 치고 이제 슬슬 실모를 풀 시기니 실모를 풀기 시작하는데 뭔가 이상하다. 실모 점수 변동폭이 엄청 크게 나옴. 자신 있는 테마가 나오면 점수가 잘 나오는데, 자신 없는 테마가 나오면 점수가 폭망함. 그래도 최고점 찍었던 자신을 보며 자기위안을 하며 수능 때까지 버팀.

다가오지 않을 것 같던 수능 날이 왔는데, 눈물이 앞을 가린다. 수능 날에는 내가 자신 있던 테마만 나오지 않거든."

-> 별로 없을 거 같지만 저 때 거의 대부분 고3이 저 테크트리를 타며 수능을 폭망했다. 뉴런 세 번 돌리고 4등급 나왔어요ㅠㅠ : 니 잘못도 아니고, 현우진 잘못도 아니고, 수능이 잘못한거란다..

E. 그러다보니 '트렌드' '소재 적중'에 대한 이야기가 학원가에서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거친 학생이라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시험, 예전에 공부했던 방식으로 지금도 대비하는 시험이 좋은 시험이지. 근데 요즘은 이게 중요하고, 내년엔 저게 중요할거고, 이번 소재가 적중했니 안 했니 트렌드를 타니 이딴 식의 시험으로 변하니 학생들도 휘둘릴 수 밖에. (과탐이라고 다르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요즘 수능 생명과학은 생명과학이 아니라 그냥 퍼즐, IQ 테스트거든.)

# 그러니 평가원이라고 무슨 신같은 존재로 여기면 곤란하다. 한 때 독보적인 능력을 가진 집단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아닌 거 같거든. SEO 업체들의 얕은 트릭에 속아넘어가 진짜 양질의 컨텐츠 대신 검색엔진에 교묘하게 최적화된 쓰레기 마케팅 컨텐츠를 검색결과 첫 페이지에 보여주지 않기 위해 엄청난 눈치작전을 벌이고 있는 네이버처럼, 시중에 사설 모의고사나 각종 스킬이 늘어나면서 적중을 회피하기 위해 자꾸 낯선 부분을 건드리고 더 배배 꼬아서 출제하니 문제를 그 따위로 낼 수 밖에 없지.

아니, 본말이 뒤집혀도 이렇게 뒤집힐 수 있나?

F. 당신도 아다시피 시험을 잘친다고 해서 뛰어난 인재라는 뜻은 아니다. 특히 비정상적으로 변한 최근 수능의 세태에서는 더더욱. 이런 수능 시험의 변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현우진이 수능 붕괴조짐을 예측하고 조기은퇴를 예고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G. 나도 여기에 숟가락 얹어 하나 예측하자면, 8~10년 뒤 수능이 붕괴된 이후 평가양식은 ① 기초소양을 붇는 '적성검사' 부문과 ② 실제 학업성취도를 평가하는 '대입 학력고사' 두 개로 분리될 가능성이 높다고 봄.

'적성검사' 부문의 수학은 중학교~고1 수학을 초과하지 못하게 출제되고,
'학력고사' 부문의 수학은 '상경계 대상 A' '이공계 대상 B' 두 개로 나누어 2017 이전 수능 범위로 회귀.

그러면 결국 중학교 범위~고1 범위의 수학수요가 폭발할텐데, 내가 지금까지 시중 거의 모든 참고서를 찾아봤는데 수능 수준의 수학은 기출분석서도 너무 많고 관련 인강도 너무 많은 반면, 중학교 범위의 수학이 국가 주관시험에 출제되었다 가정했을 때 현재 시중의 수능대비서적만큼 깔끔하고 완벽하게 학습시켜주는 책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중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정석과 뉴런의 명성에 도전하는게 목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