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당신과 나의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지 않는다

A. 1883년 미국 등 서방세계로 파견된 보빙사는 미국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어떤 충격을 받았을까.. 우리가 버선발을 바쁘게 내딛으며 대동여지도를 그려내는 동안, 영국에서는 이미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었다니, 이 나라는 기왓집도 없는데 저기 저 삐까뻔쩍한 건물들은 대체 무엇인가, 전기라는 것이 호롱불보다 훨씬 더 밝은 빛을 내는구나. 우리가 지금 미래 세계에 와있는건가? 하는 착각이 들었을 것이다.

# 그러므로 보빙사는 단순히 조선에서 서양으로의 공간적인 여행임과 동시에, 18~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시간여행이기도 하다. 해외학회에서 최신 학문을 가지고 토론하기 위해 출국하는 교수님들,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유학생들.. 이 사람들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의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거다. 하이퍼루프가 달리고, 초고속 인터넷이 깔린 21세기의 선진국에서 배우고, 체험하는 문명의 이기는 조국의 그것과는 다를테니까...

# 미국에선 2007년 이미 아이폰을 시작으로 스마트폰 시대가 열렸었지만, 201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스마트폰 열풍이 시작된 나라도 있다. 2010년에 아이폰을 손에 쥐며 스마트 신인류가 된 사람도 있고, 2020년이 되어서야 스마트 신인류의 범주에 들어오며 그 편리함에 감탄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 이제 눈치챘겠지만,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던 방향이든 아니든) 미래는 이미 어딘가에 와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고르게 분포되지 않은 것 뿐이다. 즉, 세계는 동일한 시간 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보다는 동시대의 어느 한 시점이라도, 여러 지점에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낫다.

B. 1)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정상 DNA 뿐만 아니라 암종의 유전자까지 모두 염기 서열을 분석한 세계 최초의 20인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스탠퍼드, 존스 홉킨스, MIT, 하버드 브로드 연구소 등 최고의 연구진이 수행하던 이 작업은, 그가 췌장암보다 언제나 한 발짝 앞서 있도록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초대형 규모의 프로젝트는 당시 기준으로 10만 달러 이상이 들어갔으나.. 2014년 1000달러 수준으로 떨어졌고, 현재 10만원만 내면 원하는 사람 누구든지 받을 수 있다.

# 10년 전 잡스가 1억원을 들여 받았던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을, 2020년에 살고 있는 우리는 10만원에 이용할 수 있다. 그러니까... 스티브 잡스는 1억원을 주고 10년 후의 미래를 산 셈이다. 그에겐 10년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으니까...

# 2)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며 중학교 2-1 에이급 수학을 풀고 있을 시절, 우리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대치동에서 먼저 시도되는 책은 5년이 지나서야 전국으로 퍼진다' 내가 풀고 있는 이 문제집은 이미 5년 전 대치동 아이들이 풀던 책이라는 이야기. 즉.. 교육 문제에 있어서 대치동이 다른 지역보다 5년은 빠르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이 말이 딱히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우리는 대치동피플이 공부하는 자료가 우리 커뮤니티까지 들어오기까지 5년간 뒷북을 치고 있었던 것! 이런 한 발 앞선 정보력의 우위.. 이것이 소위 말하는 "강남엄마"들이 돈다발을 싸들고 대치동으로 달려가는 이유이다.

# 3) 200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동네에 널리 퍼져있던 비디오 대여점을 기억하는가? 1990년대 영화 관람료는 4000~6000원 수준이었으나, 일반적으로 3~6개월만 기다리면 DVD 업체로 유통되어 1/3 수준의 가격인 2000원 수준에서 볼 수 있었다. (더더욱 오래 전에 나온 구작의 경우, 200원 수준의 가격이 형성되었다.)

# 즉, 영화관에서 상영이 끝난 이후 몇 달만 기다리면.. 더 저렴한 가격에 DVD가게에서 동일한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보고 싶은 시간대에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자세로 영화를 보기 위한 목적 이외에, "더 늦게 보는 대신 더 저렴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 또한 존재했다. 이런 절묘한 시간차 공격을 보고 Time versioning이라 부른다. 최신폰이 출시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떨어지는 것도 비슷한 원리. 비싸다 생각하면 기다리면 된다. 그럼 더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으니까!

# 결국 돈을 더 준다는 것은, 1) 다른 사람보다 먼저 유전자 분석을 하고, 2) 다른 사람보다 먼저 새로운 문제 유형을 접하고, 3) 다른 사람보다 먼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특권을 구매하는 행위이다. 시간은 곧 돈이라니까!

C. 이런 '돈으로 미래를 사는 행위'는 인터넷 세계에서도 충실히 적용되는데, 우리가 무료로 10화를 보는 동안 돈을 내고 14~5화까지의 유료콘텐츠를 즐기고 온 사람들이 '미래에서 왔습니다^^'라며 스포일러를 하곤 한다. 아이돌 기획사들 역시, 돈을 내고 공식 팬클럽에 가입한 이들에게 방송 스케줄이나 발매 예정 앨범에 대한 정보를 먼저 흘리곤 한다. 이 역시 미래는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오는 것이 아닌, 동시대라 할지라도 여러 시간대가 서로 공존하고 있다는 예시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 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흐르는 절대적인 흐름이 아니라니까!

D. 애플은 구형 아이폰이라고 쉽게 시장에서 퇴역시키지 않는다. 비싼 프리미엄 신제품이 나오면, 2~3년 전에는 비싸서 살 수 없었던 아이폰 구형의 가격을 낮추어 저가모델로 돌려버린다. 아이폰 6S는 아이폰 SE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아이폰 8은 아이폰 SE2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말이다. 미래형 모델 아이폰 11에 시간 프리미엄을 붙여 비싸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구시대 유물일지라도, 2~3년전 아이폰 6S/아이폰 8이 비싸서 사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니까.. 돈이 없어 최신형 아이폰을 사지 못한 당신에게, 애플은 아이폰의 저렴한 과거를 팔러 온 것이다.

# 이렇게 애플은 미래 모델인 아이폰 11 Pro, 현재 모델인 아이폰 11, 과거 모델인 아이폰 8에 차별화된 가격을 달아 시간 프리미엄 장사를 한다. 그러므로 아이폰 11 Pro를 사용하고 있는 당신, 최신 5G 네트워크를 사용하고 있는 당신, 당신은 미래에 있는 것이다. 다만 미래답게 프리미엄을 붙이는 것일 뿐. 시간은 곧 돈이니까.

# 이렇게 돈으로 미래를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얼리어답터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