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기간

본과 1학년 1학기 내내 다들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있다.
‘아, 진짜 두 번은 못해먹겠다....‘
최악의 경우 오전 8시부터 밤 12시까지 하던 카데바 실습,

마지막 날에는 땡시를 봤는데, 15초 안에 답 기억 안 나면 그냥 틀리시고 빨리 다음 문제로 넘어가라는 뜻인 저 땡-소리는 지금 들어도 싫다

시험 기간만 3시간이었던 빡지 시험 생리학 시험들,

제일 위에 한 줄이 문제고, 나머지 모두가 답안이다. 저걸 그대로 다 외워가서 백지에 다 쏟아붓고 오면 된다

되도안한 실력으로 의학논문 분석해서 교수님께 가져갔다가 영혼까지 털리는 의학생리학 실습,

희생당한 쥐들.. 인간이 미안해..

최소 2주에 1번은 보던 시험들까지. 거기서 과동아리도 빡세다면... RIP.. (내가 그랬다)
또 1-1은 유급생이 가장 많이 나오는 학기이기 때문에,(매년 8~10% 정도는 1-1때 유급을 한다.)

다들 항상 '혹시 내가..?'하는 유급의 공포에 떨어야했다. 그래서 다들 스트레스도 엄청나게 받았고 많이 예민하던 시기였다.

이렇게 빡세게 애들을 굴리는 학교에서도 가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시험 전날 밤을 새며 열심히 공부해놓고 깜빡 졸아서 정작 시험을 보러 오지 못한 경우가 생각외로 있었다.(심지어 많았다)

Aㅏ...

시험을 안 봤으니 당연히 0점이고. 시수가 높은 시험의 경우 이렇게 날려버리면 유급의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언제 한 번은, 시험이 9시에 생리학 시험, 13시에 생화학 시험, 15시에 치과재료학 시험 이렇게 있었는데, 9시에 시험을 보고 한 숨 자고 오겠다며 집에 갔던 동기형이 13시에 돌아오질 않았다(..)

당연히 그 날 생화학 시험은 0점이었다. 그 형은 이후 모든 공부량을 생화학에 몰빵하여 그 뒤에 치는 시험마다 최상위권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중간성적 집계 때 상위 70% 수준까지 올라오더니 결국 B0이라는 아름다운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나보다 높았다 1~2년만 지나면 그 형은 아마 후배들 사이에서 ‘시험 한 번 날려먹고도 B받은 전설의 선배’로 남지 않을까.

내가 지금까지 본 최고의 인간승리였다

하여튼,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아침 시험 시작 10분 전에 대표단이 출석을 부르는데, 한 명이라도 학생이 자리에 없다 싶으면 대표단의 발이 바빠진다.

전화도 안 받으면 십중팔구는 자고 있는 것인데, 기숙사나 자취방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되면 몇 명이 방까지 뛰어가서 잡아오기도 한다.

참고로 나도 그런 적이 있다. 때는 대표단출석 따위는 없던 예과 1학년 1학기, 전공시험에서 재시를 걸려 재시 당일 8시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침대에 누웠었는데 깜빡 잠들었었다.

시험은 10시었는데, 무슨 미친 생각이었는지 알람도 안 맞췄던 내가 10시에 일어날 리가 없었다. 정말 다행히도 그 과목 담당 교수님이 내 지도교수님이셨고, 10시 10분에 내 번호로 친히 전화를 걸어주셨다.

전화를 받고 시계를 본 후, 머리가 하얗게 된 나는 아버지에게 SOS를 요청해 아버지 차를 타고 학교로 달려가서 시험실에 도착했는데, 20분 늦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던 교수님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F받아도 할 말 없을 상황에서 C0라는 영예로운 점수를 내려주신 그 교수님께는 아직까지도 감사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그렇다.

물론 그 날 아버지께 엄청 혼났다(..) 아버지도 교수신데, 평소에 잔다고 시험 못 보러 오는 학생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을까. 하필이면 그런 정신나간 학생이 자기 아들이었다니.

그런 개인적인 경험도 있고 그래서 나는 아예 시험 전날이면 무조건 학교에서 밤을 새기로 결심했었다. 아무래도 학교에 있으면 깜빡 잠든다고 해도 동기들이 다 옆에 있으니 시험을 못 칠 일은 없을테니까.

물론 실제로 밤을 통째로 샌 적은 별로 없다. 전날 밤에는 학교에서 모든 시간을 보내며 교실에서 공부도 하고,(우리 학교 같은 경우에는 교실이 24시간 open되어 있어서 많은 학생들이 시험기간에 교실에서 공부한다.) 공부하다 질리면 소파에서 폰 만지며 쉬다가 30분 정도 자기도 하고, 배고프면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서 즐겨 자는 장소로는 3군데가 있었는데, 교실 바깥 바로 앞의 소파를 제일 즐겨썼었고 교실 뒤에 아무 책상 위에서 자기도 했었고, 바닥에 공용요가매트를 펴고 그 위에서 자기도 했다. 4층에 남자휴게실도 있었는데, 바선생이 출현했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새벽 3~4시에 나밖에 없는 고요한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몇 명이 들어오는데, 서로 번갈아깨워주며 30분씩 자고 공부하고 그러다가 차츰 밖이 밝아지고 짹짹 새소리가 들리면 시험기간이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아침이 되면 마스크 쓰고 산발인 머리로 학교에서 시험 다 보고 기숙사로 가서 바로 기절하거나 or 씻기만 하고 토스트 하나 사서 다시 학교로 가 수업 듣고 그랬는데,

학기 14주~18주차 스케줄이다. 한 주당 5개로 구성된 것이 월화수목금이고, 빨간날이 시험이다. 정규시험은 거의 월요일이었는데 주말에 쉬는 날 따위는 보장해주지 않는다 학기 말이 되면 그런거도 없이 저렇게 일주일에 몇 번씩 시험을 본 적도 많았다.

저 많은 시험 전날에는 '무조건' 학교에서 밤을 샜으니, 생체리듬이 박살나는건 당연한 결과였다.

커피는 쓰다며 냄새도 안 맡던 내가 도핑 수준으로 세네잔씩 먹어가며 카페인을 몸 속에 쑤셔넣고, 저런 말도 안 되는 생체리듬을 한 학기 내내 지속했으니 당연히 건강이 좋을리가 없었다.

그 덕에 1학기때에는 병을 달고 살았었다.
3월 말 한 번은 쉬는시간에 일어나서 기지개를 한 번 폈는데, 순간적으로 하늘이 뒤집어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쓰러져있었고, 일어나려고 노력해도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었다. 나중에 이게 기립성저혈압임을 알게 되었는데, 다음 수업시간에 밖에 소파에서 쉬다가 바보같이 다시 수업 들으러 들어갔다.

그 이후 살기 위해 헬스에 등록했다.
추가로 불면증에도 시달렸는데, 그 덕에 종강하고도 3~4일은 집에서 하루에 16시간씩 자면서 요양했다.
(당시에는 편한 예과생활을 보내다 갑자기 본과에 들어와서 공부에 치이고 동아리에 치이고 해서 몸이 적응을 못했었다. 지금은 리듬관리도 하고 운동도 하고 매우매우 건강하다)

그렇게 기숙사보다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며 교실과 친하게 살았던 나는 지금도 시내 약속 전 시간이 조금 남을 때 학교 교실에서 쉬다가 가곤 한다. 교실이 나에게는 식당이자, 숙소이자, 독서실이자, 편안한 휴식처가 된 셈이다. 휴대폰 만지면서 시간 때우다 가끔 뒷자리에 누워있으면 보통의 반응은 ‘쟤 저기서 뭐하냐?’ 이러더라

결론 : 잠을 잘 잡시다 밤 새지 말아요..